*키워드: 새드

*필력상승용

*세상의 이런일이 나왔던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각색한 글입니다.




한조각의 기억




기억을 잃어간다. 야금 야금, 집어삼켜지듯이 기억을 잃어간다. 카게야마와 농익은 사랑을 했던 서른살의 어느 날부터. 국대가 되었던 스물다섯의 오이카와까지. 차츰 차츰. 모래성이 부서지듯 오이카와의 기억이라 불린 알 수 없는 형태는 사라져갔다. 


햇살이 따뜻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스물다섯의 오이카와인 모양이었다. 잠꼬대가 제게 자랑하는 꼴이 아무래도 스물 다섯인게 틀림 없었다. 국대가 되었다 자랑하는 오이카와를 스물셋의 제가 끌어안고 펑펑 울던, 그때인게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는 스물 여섯이더니. 카게야마가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놓여진 약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오이카와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이렇게 자꾸만 어려져 가니 걱정이다. 나중엔 어떡하지. 카게야마가 눈을 감았다. 이와이즈미상에게 말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문득 생각하다 카게야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어른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긴. 자그마치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제가 어른이 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손을 올려 오이카와의 콧날을 쓸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흩어진다. 당신이 아프다니.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다. 언제나 나를 돌볼 것만 같았던 당신이었는데. 오이카와의 병은 제법 유명했다. 갑자기 스물여덟에 은퇴를 해놓곤 병이라니.


그가 갑작스래 병에 걸렸다. 기억을 잃어간다 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사실 오이카와에게는 딱히 중요치 않았던 것 같았다. 기사가 뜨자마자 갑자기 제가 있는 미국으로 와서는 하는 소리가 그 말이었으니.



'토비오짱. 보고싶었어.'



비가 오는 날, 쫄딱 비에 젖은 생쥐마냥 처량하게 있는 모습에 카게야마는 마지 못해 제 멘션의 문을 열었다.



"...으응...훈련가기 싫다."


"오늘 훈련 없어요."


"진짜?!!"



오이카와가 이불에서 뒹굴거리다 카게야마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휴식이야? 정말 좋다. 그리곤 동그랗게 드러난 카게야마의 이마에 연신 입을 맞췄다. 나 진짜. 토비오짱 없으면 어떻게 살지?  오이카와의 투덜거림에 카게야마가 쓰게 웃었다. 잘 살 수 있어요. 카게야마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울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마."


"농담아닌데요."


"토비오짱. 냉정해."


"오이카와상에게 익숙해진 탓이라고 해두죠."



아. 조금 더 잘려고 그랬는데. 무리인가. 카게야마가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에게 익숙하게 우유빵을 건내고 저는 토스트기에 식빵을 집어넣었다. 능숙하게 커피를 끓이는 카게야마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오이카와가 그냥 웃음을 터트렸다.



"토비오짱. 이제 커피 마실만한가봐?"


"아..네."


"나도 한 잔줘."



집안에는 달력이 없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병에 걸린 이후로, 그는 제대로 나가본적이 없었다. 기껏해봤자 카게야마의 멘션 근처 체육관이나 공원정도. 그래도 오이카와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같이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장을 보는 기억이 있다. 단지 오늘만 집안에서 나가지 않는 것 뿐이다. 적어도 오이카와의 기억은 그랬다.



"영화볼까."


"뭐 볼까요?"


"흐음. 지금 몇시야?"


"2시네요."



우리 너무 늘그막에 일어났는 걸? 오이카와가 침대에서 팍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원룸형태의 집인 카게야마의 집은 채광이 좋았다. 그리고 과거에 살던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집 밖 풍경과 비슷하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빔 프로젝터를 내렸다. 뭐 보지? 뭐 볼까? 카게야마의 주위에서 쫑알거리던 오이카와가 무덤덤하게 식빵을 베어무는 카게야마의 모습에 실망한 듯 입을 부풀렸다. 너무한거 아냐. 토비오짱?



"점심은 뭐 먹을까요? 시켜먹을까요?"


"그거 점심 아니였어?"


"........."



카게야마가 손에 든 식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니. 이거 조금 많이 부족?!! 말을 얼버무리는 카게야마의 모습에 오이카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어. 알았어. 더 먹자. 토비오짱. 아가 돼지네. 돼지 아닙니다. 카게야마가 익숙한듯 커피 한잔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앉았다. 담요를 가지고 온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와 자신의 어깨에 담요를 걸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건내는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영화는 어제도 봤던, 지난번에도 봤던. 몇 번이나 본지 모를 로마의 휴일. 이제 대사를 외울 지경이 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 커피 한모금을 삼켰다.


[상상도 못 하실거예요?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요..]


[머리를 깍는다든지 젤라또를 먹는다든지 하는거요..?]


오드리 햅번이 그레고리 펙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던 공주가 처음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나날들. 현실과는 달리 참 낭만적이다. 낡은 흑백영화의 필름이 끊기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이 영화는 내일 또 다시 반복될것이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붙들었다. 이 대사가 끝나면 오이카와상은 내게 투덜거리겠지.



"나도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 토비오짱."


"뭘 하고 싶으세요?"



그럼 그는 웃다가 제 이마에 키스를 하며 속삭일 것이다.



'너랑 이렇게 영화보는 거.'


"너랑 이렇게 영화보는거."





*

*

*




오늘은 스물네살의 오이카와다. 


카게야마가 한숨을 쉬었다. 꿈이냐며 방방 뛰는 오이카와를 말리느라 힘이 빠진 상태였다. 하긴 스물네살은 저와 같이 살기 전이었나. 다행스럽게도 오이카와는 여기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여튼 오이카와상 운동 안 한지 꽤 되었을텐데. 체력이 어쩜 그리 넘쳐나는지.  지금 오이카와의 나이가 32살, 카게야마의 나이가 30살인걸 감안하면 굉장한 체력이었다. 방방 뛰는 오이카와에게 피자와 치킨을 먹이고, 좋아하는 우유빵을 사다주고 불고기를 했다. 오이카와를 위해 주구장창 불고기만 하다보니 이제 보지 않고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기를 볶던 카게야마가 갑작스럽게 기침을 했다. 오늘 유독 심한것 같다. 카게야마가 황급히 물을 삼켰지만 기침은 멎지 않았다. 


기침 소리를 죽이기 위해 숨을 참던 카게야마가 비틀거리는 몸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오이카와는 왠일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계속해서 기침을 토했다. 숨이 멎어버릴 것 같다. 내장이 쓸려나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살려줘. 가슴이 아팠다. 타들어갈듯이 아팠다. 기침소리가 커지고 오이카와는 때 맞춰 영화의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줄 곳 묻던 그 대사가 화장실 안의 카게야마에게 들리고 나서야 카게야마의 기침이 멈췄다.


'상상도 못 하실거예요.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요..'



"하..."



변기에는 피가 가득했다. 변기물을 내리고 카게야마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괜찮아. 아직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 손을 씻던 카게야마의 눈에 열린 서랍장의 귀퉁이가 들어왔다. 얼굴을 수건으로 닦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랍장의 문을 열었다. 


내가 뭐 여기 넣어뒀었...



"...."



거짓말. 


카게야마가 입을 틀어막았다. 서랍장은 울긋불긋했다. 수많은 메모지들로. 글씨는 익숙했다. 단정한 오이카와의 글씨체. 입술을 깨문 카게야마가 조심스래 가장 빛 바랜 메모지 하나를 떼어냈다. 



[안녕. 과거의 나. 

나는 32살의 오이카와 토오루야.


내가 이 쪽지를 남기는 이유는 바보같은 토비오짱은 내게 숨길꺼란 말이지? 

이 오이카와상은 세면대 서랍장 열어보는 습관이 있으니까. 걱정마 토비오짱은 이거 안써.


...


사실. 토비오짱은 많이 아퍼. 언제 죽을지 모른데.

게다가 나까지 계속 기억을 잃어갈꺼야.


그렇지만, 토비오짱의 곁에 될 수 있는 한 계속 남아있고 싶어.]



[나는, 30살의 토오루야.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게 맞긴 하나보다. 나는 32살인 적이 없었는 걸.


...


토비오짱이 많이 아프데. 별로 믿기지 않겠지만. 믿어줘. 오늘도 피 토했는데 모른 척 해줬어.

언제 죽을지 모른데.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해줘.]



[안녕. 난 스물네살의 오이카와 토오루야.


...


토비오짱은 그 나이 먹고서도 정말 바보구나. 아니 얼굴은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이 오이카와상을 속이려하다니!

누가봐도 30대라구? 토비오짱은 눈치가 아직도 빵점이야.


그래도 야윈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하고 싶은게 있었어. 


뭐요?


너랑 영화보는 거.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뭐야. 당신 뭐냐구. 카게야마가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울고 싶었다. 흐느끼고 싶었다. 수 개월간 어려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당신의 기록. 그래도 남아있는 단 하나. 수 많은 쪽지들 중 거짓말처럼 똑같이 적힌 말 하나. 당신은 기억을 잃어갔지만 남은 건. 카게야마가 오열하듯 마지막 문구를 읽었다.



[그래도 진짜,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그 말 하나. 숨이 막혔다. 


사랑해요. 


나가서 그리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사랑한다고 그리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기억하면 아프기만 할텐데. 나는 이제 사라져야하는 사람인데, 당신은 아프기만 할텐데. 카게야마가 오열했다. 물소리가 요란했다. 커질대로 커진 영화의 소리도. 영화가 어떻게 끝났었지? 새드엔딩이었다. 결국, 오드리 햅번은 공주의 삶으로 돌아가는 엔딩. 그것이 새드엔딩이 아니라 한다면 그들이 사랑한건 한낯 꿈일 뿐일까. 나는 이제 꿈이 되어야 하고, 그건 이렇게나 슬픈데. 슬프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눈 앞이 흐려진다. 내일은 괜찮을것이라고? 우리에겐 더 이상 괜찮아질 내일이 없었다. 


남은 거라곤 과거 뿐.


물기 젖은 얼굴의 카게야마가 메모지를 뜯어냈다. 수 많은 기억들이 사라진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야. 카게야마가 메모지를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정말. 이제 당신에게 진실을 고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거실에는 언제나 그랬듯 로마의 휴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오드리 햅번이 그레고리 펙에게 입을 연다. 


 

[어떻게 작별을 하죠?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요.]


[애 쓰지 말아요.]



스물넷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울고 있었다.



우리가 끊임없이 사랑을 약속하고 사랑을 고백하던 영화를 보며,

그는 울고 있었다. 



"오이카와상."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곤 환하게 웃었다. 결국 오이카와는 울며 제게로 뛰어왔다. 아프지마. 내 사랑. 아프지마, 제발. 토비오. 오이카와가 오열했다. 우리 잘 살고 있는 거 아니였어? 왜 이렇게 말랐어. 저를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카게야마가 간신히 그에게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토비오..? 토비오?


정말, 사랑해요.





*


*

*




[이와짱.]


"왜."


[토비오짱이 없어.]



이와이즈미가 입을 다물었다.  전화기 너머의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죽었어. 그 녀석은. 그리 말해야할까. 오이카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명 어제 같이 잤단 말이야. 오이카와의 투덜거림에 이와이즈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상이 기억을 조금씩 더 잃다보면, 제 기억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어디 갔을까? 오늘 대학 면접이라도 있나? 여기 토비오짱 집 같단 말이야!]



'나 기억을 잃어간데. 이와짱.'


근데 웃긴거 있지. 그게 다행인 것 같아. 오이카와가 웃으며 이와이즈미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토비오짱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거든.




*



오늘은 스물 하나의 오이카와 토오루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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