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게군님의 리퀘스트입니다.

*리퀘스트 나머지 2개는 요번주 안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좋은 소재 주셔서 감사해요~!

*키워드:네임버스, 쓰레기공, 후회공, 




차라리, 당신의 운명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좋을 텐데.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이러면 안되잖아. 새하얀 다리에 적힌 글자에 카게야마는 더없이나 괴로워졌다. 카게야마는 몇번이고 다시 이름을 확인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선명하게 적힌 글자에 카게야마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머리를 적신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카게야마는 몇번이고 제 허벅지를 확인했다. 카게야마가 결국 욕조에 주저 앉아 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학교 가야하는데. 


네임버스, 운명의 상대가 몸에 적혀있는 사람. 어떤 이들은 네임버스를 축복받은 이들이라 말했다. 운명의 상대. 오이카와를 떠올린 카게야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 그게 어떻게 운명이야. 가슴이 아팠다. 먹먹한 감정이 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가슴을 내리쳤다. 사랑받지 못할거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발가벗은체 욕조에 앉아 카게야마가 몸을 웅크렸다. 그녀가 서럽게 울었다. 좋아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동경했어요. 그렇게 내쳐질 줄은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제 다리에 적힌 그 이름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

*


*



'오이카와상과 친해?'


'..............'


'오이카와상은 너 싫어해.'



게다가 오이카와상은 네임버스가 아닌데 왜 자꾸 들러붙는거야. 여자아이가 입을 연다. 카게야마가 부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나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고 싶었구나. 서글픈 얼굴이 된 카게야마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아직 중학생인 아이들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대장격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물었다. 배구하고 싶어? 카게야마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카게야마의 손목을 짓밟았다. 고통에 카게야마가 괴롭게 울부짖었다. 아파?  그러게. 오이카와상에게 꼬리치지 말았어야지.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며 그저 흐느꼈다. 아프다고, 괴롭다고, 무섭다고 비명을 질러도 구해줄 사람은 없기에.


하지만 저를 이런 나락으로 집어 넣은게 당신임을 알기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카게야마가 잠에서 일어났다. 아. 긴생머리가 흩어진다. 그날 이후 길렀던 머리는 어느새 허리를 넘길정도로 자라있었다. 손목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손을 만지작거리던 카게야마가 머리를 하나로 길게 묶었다. 악몽이네. 카게야마가 덤덤하게 물을 삼켰다. 이제는 더이상 배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손. 카게야마가 침대에 누워 제 손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오바죠사이랑, 연습시합이 있어서 그런가. 카게야마가 교복을 입었다. 입맛이 없었다. 사실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말라버린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도 교복 밑. 허벅지. 난도질 된 그의 이름. 그가 아파하면 저도 아팠다. 그가 슬퍼하면 저도 슬펐다. 제 손이 부러지고 나서도 저는 그의 감정을 느꼈다. 좋아했었던 것 같아. 카게야마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었나. 잠시 생각하던 카게야마가 이어폰을 귀에 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모님이 챙겨준 과일을 가방에 넣은 카게야마가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오른손은 저려왔다. 카게야마가 쓰게 웃었다.


그러니 이제 배구는 할 수 없었다.



"일찍왔네? 토비오."


"안녕하세요. 키요코상."



키요코가 카게야마를 반겼다. 부원들도 같이 카게야마를 반겼다. 괜시리 부러웠다. 부원들은 들떠 있었다. 카게야마가 애써 웃었다. 타나카가 긴장에 몸을 떠는 히나타를 놀렸다. 그  모습이 웃겨 카게야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아!- 카게야마의 어조에 히나타가 울상을 짓는다. 그치만 긴장된단 말이야. 괜찮아.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크게 뜨다 입을 열었다. 



"배구를 못하는 것보다는 긴장되는 게 낫잖아."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모든 학교의 관심을 받은 수재. 서브, 토스, 리시브 어느것하나 모자라지 않은 천재. 월간배구에도 이름을 올렸던 카게야마이지만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카게야마는 배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긴장에 심하게 떨던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올려다본다.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머리 위에서 손을 내렸다. 무서워하지마.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의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운동을 하기엔 무리에요.'



그 말을 듣고 울었다. 한참을 울었었다. 방구석에 쳐박혀 울음을 토해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코트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당신을 보고 동경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어.


정말,


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좋아해요.


수줍게 제가 뱉었던 말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그저 동경일 수도 있었다. 세터. 현 내 최고의 세터. 제가 바라던 그런 사람. 그래. 그게 사랑이었을까. 카게야마의 긴 생머리가 풀어졌다. 흔들리는 머리칼에 카게야마가 조용히 체육관 문을 바라보았다.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섭네. 카게야마가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카게야마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중학교에 오니 대단한 사람이 있었다.


세상이 온통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라니. 보답이라니.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너무나 힘들었다. 왜일까. 당신의 이름이 새겨진 내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카게야마가 도망치듯 체육관을 벗어났다. 시미즈의 물음에 카게야마가 그저 웃었다. 화장실 좀. 카게야마가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주머니에서 습관적으로 약을 꺼내삼켰다. 약이 썼다. 먹기 싫지만, 이러다가 발작이라도 오면.



".............토비오짱?"


"........."



카게야마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생머리가 바람이 흩날렸다. 카게야마가 당황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변함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카게야마가 늘 차고 다녔던 손목 아대가 오이카와의 눈을 사로잡았다. 도쿄간거 아니였어? 토비오짱 실력이면. 빈정거리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됐어. 내가 무슨 지금. 당신에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무시한 체 걸음을 옮기려하던 순간이었다.



"예뻐졌네. 토비오쨩."


"........."


"그땐 선머슴 같더니."



오이카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카라스노 매니저인거야? 왜 배구는 안해? 체육관 갈꺼면 같이 가자. 제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손에 카게야마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거 놔요. 하지마. 제발. 당신이 미칠 듯이 싫은데도 심장은 뛰었다. 빌어먹을 운명이라는게 저를 뒤덮는다. 당신이 좋았다. 맞아. 당신을 사랑했다. 하지만.



"저 싫어했잖아요. 오이카와상."


"그건 그때일 뿐이잖아?"


"...............놔주세요!!"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벗어나려 발버둥치려는 카게야마 덕분에 아대가 벗겨졌다. 얇은 카게야마의 손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흉하게 남은 카게야마의 손목 상처. 누군가 손목을 난도질이라도 한 것마냥. 그 흉터에 오이카와가 당황했다. 토비오짱? 카게야마가 벗겨진 아대를 바라보다 손목을 쥐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뿌리쳤다. 그만해요.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줘. 카게야마가 소리쳤다. 



".........배구를 안한게 아니라."



할 수 없는거야?


당황한 얼굴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되물었다. 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보다 훨씬 말라버린 팔목에 오이카와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보다 카게야마는 더 자랐지만, 메말라 있었다. 카게야마가 벽에 몸을 기대었다. 소녀가 오이카와에게 도망치려 애를 썼다. 그만해요. 제발. 내게 오지마. 카게야마가 오열했다. 아팠다. 제가 도려냈던 허벅지가 아파온다. 카게야마가 주저앉았다. 손목에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만족해요?"



내 인생이 망가지니까 좋아?


카게야마가 오열하며 입을 열었다. 선배가 좋았어요. 그저 좋았어요. 그냥 배구하는 걸 동경했어요. 이제 난 배구도 못해. 배구공도 못들고, 섬세한 건 하지도 못해요. 선배 팬이라는 사람들이 내 손목을 짓밟았어. 당신. 그때 좋아했잖아?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들어간다. 뭘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그때 행복했죠?



"내 손목이 부셔지고 있는데."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 때문에 웃었어. 당신이 웃고 있으니까!! 카게야마가 악에 받힌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눈물 자욱이 남은 얼굴로 카게야마가 가슴을 내려친다. 하지만 골절로 힘줄이 끊어진 손에 힘이 들어갈리 만무했다. 멍하니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땅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다. 바닥에 얼룩이 젖어갔다. 밀려올라간 치마. 다리에 남은 흉터들. 담배꽁초로 지진 흔적.  수많은 허벅지의 흉터 사이로 난도질 된 이름이 들어왔다.


오이카와 토오루.


제 이름이다. 설마.



"............토비오 너.. 네이머야..?"



그게..나고?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소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흐느끼는 소리만 공터에 울려퍼질뿐.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가슴이 쓰렸다. 토비오를 잡는다고? 잡을 수 있는 자격이나 있나? 내가. 다름아닌 네게.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오이카와상이에요?! 왜. 저를 탓하는 카게야마의 말에 오이카와가 눈을 감았다.


'천재는 싫단 말이지.'


우시와카짱 같잖아. 토비오짱. 


제가 무심하게 흘렀던 말. 아니 저는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저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란 걸. 그러나 이미 저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과거의 날. 카게야마가 오열했다. 온통 상처가 난 카게야마의 몸, 가슴 한 쪽이 왠지 모르게 시렸다. 카게야마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손목이든. 허벅지든. 오이카와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하지만 그 말은 입안을 멤돌기만했다. 어린 오이카와가 아니였다. 열등감에 뭉친 열여섯에서 열아홉이 되어버린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카게야마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카게야마가 말을 내뱉었다.



"왜..내가 당신을 좋아했을까?"



당신을 사랑하는 운명이라는 게 죄인거야?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저 지금은 울음을 토하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오이카와는 조용히 제 가슴께를 잡아 쥐었다.





*





그리고. 그 날 저녁, 오이카와의 가슴에 이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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