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접은 오이카와 X 손을 다친 카게야마 X 회사원이 된 쿠니미.

-시간이 불규칙합니다.

-현타주의.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의해주세요!


*




부서질 수 있다면, 진작에 부서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껄. 그 어떤 희망도 없이.




겨울이 집어삼킨 봄 上





나는 사랑받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웃긴 말이지. 손에 들린 연필이 책상 위를 굴러간다. 카게야마가 맥 없이 굴러가는 연필을 손에 쥐었다. 아. 왜 그게 부러웠지? 그냥. 그래.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워보이고, 행복해보이는 그것이 더 없이나 두려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게는 손에 움켜쥔 것들이 없어져도 남아있을 사람이 없는데, 그들에게는 있는게 부러운거겠지. 혼자가 익숙하다고? 그건 다 개소리다. 혼자서 아무리 뛰어난 길을 걸어도 결국엔 외로웠다. 그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은 사실. 내가 공을 던졌을 때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애써 부정했던 것.


사람에게 상처받아 혼자 있는 길을 택했건만, 외롭고 고통스러운건 매한가지였다. 말도 안되는 벽에 부딪힌 히나타가 배구를 접었을때보다 더 끔찍한 꿈이었다. 깨고 깨어나길 빌었지만, 깨어나지 않는 지옥같은 현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카게야마가 책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머리칼이 작은 창문을 통해 비추는 햇살에 반짝인다. 카게야마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폈다. 그리고 손에 선명하게 그려진 현실의 자욱. 붉게 달아올라 아직도 흉터가 남은 손.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손. 카게야마가 얼굴을 붙들어 쥐곤 몸을 웅크렸다. 제길. 혼잣말처럼 뱉어지는 말. 카게야마가 쓰게 웃었다. 방안은 더없이 따스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더라. 카게야마.'



배구공을 건네며 제게 웃음 짓던 히나타가 떠올랐다. 작아도, 괜찮아. 라고 애써 제가 입을 열었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손에 들린 술이 목너머로 쓰게 넘어갔다.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카게야마의 말에 히나타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손에 들린 술잔이 찰랑거렸다.



'웃긴 말이지만, 나는 너를 통해 꿈을 꾸었어.'



하지만, 나는 너를 보고 절망해. 히나타는 절망스러워보였다. 내게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차있으면서 한 없이 절망스러워보였다. 병신 같은 놈. 차라리 원망해. 제 말에 히나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너를 어떻게 원망해. 그건 그저 내가 갈 수 없는 길인 걸.



'그저 되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카게야마. 언젠간 그 순간이 너에게 오면.'



그때는 네가 아프질 않길 바라.


목소리는 더없이나 따뜻했다.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원룸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따듯해서 카게야마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적지 않는 노트도, 빼곡히 들어찬 배구 비디오도, 그 어느것도 이제는 필요없는 날. 먼지가 앉아버린 배구공이 눈물나도록 설운 날이었다.




*


*

*



미래는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지 않아. 웃기지마. 왜. 누군가가 희망이라도 줬어? 할 수 있다고. 네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라고? 참 좋은 소리네. 근데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네 한계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배구 동아리 왕자님? 신랄하게 뻗치는 선배의 말에 오이카와가 주먹을 웅켜쥐었다. 치솟아오르는 화에 오이카와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지랄한다. 입 안을 맴도는 반박성의 말은 욕설 밖에는 없었다. 그게 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잖아. 내가 무엇을 노력하던,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있을거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그걸 인정하게 만드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일어나 무엇을 말하든, 보이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이만 선배인 개새끼가 저리 지랄하는 거겠지.


무릎의 인대가 늘어나도록 수 천번, 수 만번을 반복한 점프도, 수 십번이고 반복했던 플레이 영상도, 결국엔 저런 이들에게는 알량한 자존심이 된다. 결국 내가 했던 그 모든 것들은 바스러지는 거다. 오이카와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선배는 계속 비아냥거리며 비웃었다. 오이카와, 너는 잘해봤자 프로구단이 한계야. 아니면 얼굴로 빌어먹고 살던지.


그래, 그게 한계였지.



"......성질 죽이세요. 오이카와상."


".......................죽이고 싶지 않거든요? 토비오쨩? 토비오쨩은 그 말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모르지?"


"................."



카게야마가 터진 오이카와의 입술에 소독약을 발라주다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러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가 화나서 때린 것만 어렴풋이 알 뿐, 어떤 말을 했는지 자신은 모르니까. 오이카와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카게야마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지도 몰랐다. 파란 눈동자가 멍하니 오이카와의 상처를 응시했다. 오이카와가 신경질적으로 티비의 채널을 넘기다 비아냥거렸다.



"토비오쨩은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는 재주가 있네."


".........."


"진짜 재수 없을 정도로."



오이카와의 비아냥에도 카게야마는 묵묵히 오이카와의 상처를 치료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걸어가는 오이카와를 우연히 만나 자취방으로 끌고온 건 제 탓이었으니, 비아냥거리는 오이카와를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이카와의 상처를 대충 치료한 카게야마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몇 없는 번호 중에 하나인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를 해야할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가 먹을 것을 꺼내며 고민했다. 



"근처 대학교인건 알았는데, 되게 가깝네."


".....저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도 배구해?"


"......아직은요."



카게야마가 인스턴트 식품을 꺼내다, 천천히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작은 자취방의 침대에게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토비오쨩 같은 방이네. 단정하게 정리된 비디오들과 배구공, 유니폼까지. 그리고 묘하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카게야마를 관찰하던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왜 안 물어봐?"


".............?"


"길가던 나를 끌고 올 정도면, 걱정했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내가 쳐맞은거? 피멍이든 자신의 얼굴을 가르키며 오이카와가 웃음조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한번 흘낏 바라보았다. 그래. 눈치 없는 제가 걱정할 정도의 상처였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길이 갔던 이유는 아마. 그 어두컴컴한 길. 술에 취한 대학생들 혹은 현실에 찌든 직장인들이 걸어가는 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의 얼굴이.


'나 배구 그만해. 카게야마.'


히나타의 눈동자와 닮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절망하던 히나타의 그 눈동자가 눈 앞에 아른거려서 카게야마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다들 히나타를 응원했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히나타에게 모두들 응원했다. 잘하고 있어. 더 좋은 길일꺼야. 더 나은 길이야. 꿈은 나중에 더 생각해도 되는 거야. 사실 그 말 얼마나 잔인한 말이야. 그러나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런 제가 누군가를 달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의 위로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게는 한없이 컸던 당신이기에. 그저 한켠을 내어주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



카게야마가 조용히 담요를 가져와 오이카와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올려다본다. 된장국과 인스턴트 밥을 가져온 카게야마가 탁자 위에 음식을 올리곤 털썩, 오이카와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드세요."


"............."


".............저 요리 못해서 이런 것 밖에 못드립니다. 죄송해요."



어설프게 된장국에 밥을 만 카게야마가 말했다. 그건 오이카와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오이카와가 멍하니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옆에서 카게야마가 밥을 꾹꾹 씹어삼켰다. 둘 사이에는 어느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밥을 먹기도 애매한 늦은 밤. 술주정뱅이들이 신세한탄을 읊조리는 새벽이었다.  그런데 그냥. 왠지 제가 눈물이 날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 앞이 흐려져간다. 밥을 삼킨건지 밥을 먹는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꾸역꾸역 입안에 밥을 집어넣었다. 서러움에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트리며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네.."



카게야마가 눈물을 훔치고 오이카와의 말에 대답했다.



"너가 왜 울어."


"안웁니다."



오이카와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다 카게야마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에 닫은 부드러운 피부에 흘러내리는 눈물. 파란 눈동자에서 두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따라 손을 움직이던 오이카와가 천천히 눈물을 닦아냈다.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우는거 아니야?"


"우는거 아닙니다."



조용한 새벽. 어색하게 올라온 된장국이 카게야마가 애써 할 수 있는 배려라는 걸 알기에 오이카와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나는 네게 대단한 사람인걸까. 나는 너의 꿈인걸까. 아이처럼 입안에 밥을 넣고 눈물을 흘리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끌어안은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토비오짱."



오이카와가 눈을 감았다. 아마 저도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남자 둘이 앉으면 가득 찰 정도로 작은 자취방. 몸 한켠 뉘여 쉬는 곳이 다인 이 작은 방에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래 숨을 쉬지만 꿈을 꿀수는 없는 우리들. 아니. 너는 바랄 수는 있을까.



"이제, 나 배구 그만하려고."



더 이상 네 꿈이 되지 못해 미안해. 제 어깨쯤에 묻힌 얼굴이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아. 아. 카게야마가 결국 참은 서러움을 토해냈다. 왜. 네가 울어. 오이카와가 눈물 젖은 얼굴로 카게야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울지마. 괜찮아. 잘될꺼야. 그 말, 너무 서럽잖아. 꿈을 버려야 잘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카게야마가 오열했다.


숨이 멎을 만큼 괴로운 사실이었다. 차라리 끔찍한 꿈이길 바랬지만. 이건, 네가 겪어야할 사실이고. 결국 괴로워하는 건, 이 길을 걷는 너임을 알기에.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괜찮아."



울지마.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


*


*




"지긋지긋한 인연인데 쿠니미짱?"


"..........그러게요."



쿠니미가 담배을 입에 베어물며 대답했다. 몸에 틀어맞은 정장이 답답했다. 정장 자켓을 벗은 오이카와가 난간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부서에서 온다는 능력 있는 사원이 쿠니미짱일 줄은 몰랐어? 저도 능력있다던 부장님이 오이카와상인지는 몰랐습니다. 얼굴로 유명한거겠지. 오이카와의 너털웃음에 쿠니미가 침묵했다. 공감하는거야?



"잘 지냈어?"


"..........아니요."


"........허 단호하네."



손에 들린 담배가 타들어간다. 뺴곡하게 들어찬 회색 건물 사이. 흩어지는 담뱃재들이 여린 불빛을 피워낸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불씨는 회색빛으로 삭막하게 져버린체 바람에 흩날렸다. 쿠니미가 오이카와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미소는 쓰렸다.



"오이카와상은, 잘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덤덤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담배 연기를 뿜어낸 오이카와가 쿠니미를 응시했다. 알싸한 담배향이 머리를 멤돌았다.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오이카와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무어라 고민할 거리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말. 그건 카게야마가 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쿠니미는, 잘 지내지 못했어?'


"아니."



그 질문에 오이카와가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마 저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일터다. 쓰라린 담배의 향을 머금던 쿠니미가 눈을 감았다.



못난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