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접은 오이카와 X 손을 다친 카게야마 X 회사원이 된 쿠니미.

-시간이 불규칙합니다.

-현타주의. 현실적인 결말.

-행복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행복하려 노력하는 이야기.




부서질 수 있다면, 진작에 부서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껄. 그 어떤 희망도 없이.




겨울이 집어삼킨 봄 下




입을 맞췄다. 자신을 달래기도 부족한 온기를 나눴다. 간신히 품 안에 안은 온기를 그대에게 전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기도 했으니까. 잠든 오이카와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카게야마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다.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당신이었는데, 카게야마가 쓰게 웃었다. 언제나 커보이던 그 커다란 등이, 무너져버린 건 생각보다 마음이 아팠다. 이건 세상이 나쁜 걸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걸까. 


우린 찬란할 것만 같던, 그 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서 차갑기 시린 겨울만이 남아 있는 걸까. 카게야마가 멍하니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째서 노력하는 것은 나쁜 것이 되는 건지. 카게야마가 슬그머니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수 천번, 수 만번 공을 던졌을 단단한 손이 맞부딪혔다. 당신을 동경했던 수많은 나날들이 눈 앞을 지나간다.



"저는 아직도."



오이카와상이 무서워요. 카게야마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든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말을 읊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을 동경해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제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말도 안되게 작은 온기 뿐이라. 카게야마는 미안해졌다. 같이 갈 수 있는 봄을 꿈꿨다.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봄을 꿈꿨는데. 이제는 오지 않을 봄을, 난 기다리고 있는 걸까.




*


*




[다음 뉴스 전해 드립니다. 국가대표로 뽑혔던 카게야마 토비오(24) 선수가 협회의 파벌싸움으로 인해 국가대표 직을 내려놓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치 ㅇㅇ씨의 폭로로 인해 협회의 파벌이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는데요. 카게야마 선수가 국가대표를 포기한것도 파벌싸움으로 인한 부상.....]


쿠니미가 입안에 밥을 넣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이름과, 국가대표. 반찬을 뒤적거리던 쿠니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억죄는 넥타이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쿠니미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숨을 고른체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화면에 떠오르는 익숙한 얼굴. 쿠니미가 손을 까딱거리다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익숙하게 가방을 챙겨들면서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쿠니미가 검색창에 들어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쳤다. 카게야마 토비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카게야마 토비오, 인대 파열이 사실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탓?]


[정해진 국대 자리? 양보하지 않으면 부상?]


쿠니미는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의 뉴스는 분명 인상적이겠지만 그들에게 다름을 선사할 것은 없었으니까. 짜여진 듯이 지하철로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쿠니미가 고개를 들어 지하철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잖아. 쿠니미가 휴대폰을 보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답답한 정장. 그리고 그래도 봄을 꿈꾸던 소년은. 망가져버린 세상.


'좋아해.'


'.............쿠니미..?'


'대답하지 않아도 돼.'


'미안.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알아. 어린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아직 좋아했던 걸까. 쿠니미는 흐릿하게 보이는 눈앞의 세상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졌다. 아. 적어도 너만은 꿈꾸길 바랬던 걸지도 모르겠어. 카게야마. 쿠니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지하철 한 쪽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오열하고 싶어졌다. 그리 힘들어도 우는 것 조차 하지 못할 너를 알기에 울고 싶어졌다. 


상처받은 얼굴의 네가 웃고 있었다. 깁스를 한 손목을 붙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입을 열었다. 마치 안부를 묻는 것처럼. 그게 미칠 듯이 슬펐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네가 그 말을 어떻게 내뱉었을 지 알아 눈 앞이 아득했다.


'쿠니미는 잘 지내지 않아?'


'............아니.'


나는 애써 그리 입을 열었다. 너는 웃고 있었다. 왜, 그 때 억지로 짓던 웃음을 나는 몰랐을까. 쿠니미가 숨을 토해냈다. 아니 숨을 토해내기만 해도 버거웠다.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지 세상이 칭하는 쿠니미라는 껍데기가 살아가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쿠니미가 숨을 죽인체 울음을 내뱉었다. 그 미숙한 나날의 첫사랑이던 네가, 동경이던 카게야마가,


그리 망가졌다는 사실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청춘에 안녕을 고하는 일이었다.




*




"쿠니미는, 잘 지내지 않아?"


"........"



쿠니미의 눈동자도 그리 변해버린걸까. 카게야마가 조용히 손목을 쥐었다. 망가진 손목이 딱히 그리 우울하지는 않았다. 아니 슬프긴 했지만 그리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무덤덤해진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꿈을 잃는게 아무렇지 않아질 정도로 이미 상처입어 있었으니까. 더이상 화를 낼 힘이 없었다. 푸릇히 빛나던 눈동자도, 어린날의 동경도, 어린날의 친구도 모두 잃어버린 자신에게 홀로 꿈을 좇아 무엇하리.



"아니."


"........그럼 다행이네."



애써 웃었다. 저를 사랑하던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괜찮다 말해주는 거니까.



"카게야마."


"............."


"............있잖아."



쿠니미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 쿠니미의 얼굴은 덤덤했을까? 아니 쿠니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괜찮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제 마음이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미어졌으니까.




*


*

*




"카게야마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세요. 선배."


".....?"



쿠니미가 난간에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담배를 타고 흩어지는 아릿한 담배연기가 마치 보이지 않는 봄만 같았다. 카게야마와, 저, 오이카와 선배까지. 꿈꾸던 열여덟의 어느날. 간절히 빌고 빌었던 봄 같았다. 무슨말을 하는거야. 쿠니미짱?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한 오이카와의 말에 쿠니미가 덧붙였다.



"카게야마가, 왜 슬퍼하지 않는지 아세요?"


"........"


"예전같으면 어느 다리에서 뛰어내려도 이해갈만한 상황인데."



오이카와가 고개를 돌려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그래. 제가 알던 열일곱의 소년은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이 굴었던 소년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찬란히 빛나는 봄에 걸었던, 그리 눈부시던 소년이라. 제가 동경한건지도 몰랐다. 근데. 그러게. 왜 죽지 않았을까. 봄이 오지 않은 겨울을 왜 카게야마는 꾸역꾸역 살고 있는 걸까. 다시 꿈꿀 수 없는 몸을 가지고. 그리고 그때, 쿠니미의 덤덤한 목소리가 옥상위에 울려퍼졌다.



"...........히나타도, 저도, 그리고 선배도."


"........"


"모두들 포기했으니까."



오이카와가 멍하니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쿠니미가 웃음을 지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꿈을 포기했으니까? 그 카게야마가? 그 거만했던 소년이? 오이카와가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카게야마는 약했던 걸지도 몰랐다. 옳은 사실을 말하면 손해보고, 망가지는 곳이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 아. 오이카와가 고개를 숙였다. 밀려치듯, 솟구치는 감정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을 무서워해요.'



꿈결같이 울려퍼졌던 카게야마의 말은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 제가 카게야마의 봄이라는 자리를 내려놓은지는 몇년이 지난 날. 저는 그런 세상이 벅찼다.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곳. 그곳은 카게야마에게 어울리지 않는 나락과 같았던거구나. 오이카와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절망스럽구나. 



"그래도. 이건 나름의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꿈을 포기하게 된건. 뿌연 담배 연기가 눈 앞을 가렸다. 입 밖으로 내어지는 말은 거짓을 고하고 있었지만 이건 최선의 노력이다. 애써 행복해질 수 있는, 나이를 먹어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거리가 될 수 있을 만큼의 노력. 잘 지내지 않냐는 물음에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그런 노력. 



"우린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거야. 쿠니미쨩."


"..............선배."




저는 카게야마가, 아직도 꿈꾸길 바래요. 쿠니미가 쓰게 웃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니. 일그러진 얼굴로 웃던 카게야마를 떠올린 쿠니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이제 우리는 꿈꿀 용기가 없는거에요.




*




완치는 불가능해요. 다만 재활 연습을 꾸준히 한다면 90%까지는 회복이 가능합니다. 운동선수에게 1%도 중요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해보는게 어떨까요. 


3개월전보다는 희망적으로 변한 의사의 말을 떠올리던 카게야마가 손을 만지작거렸다. 부상 이후 그 운동을 줄인터라 몸은 야위어 갔다. 다시 할 수 있다고? 카게야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부딪혀도 망가져버리는 세상인데. 어찌 다시할 수 있을까. 웃으면서 그 감독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이제 다시 꿈꿀수나 있나. 미친 듯이 하고 싶던 배구에 대한 열망도 하나 둘씩, 제 곁을 떠나는 이들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제게 말했다. 어찌 그 꿈이 그리 쉽게 사라지냐고.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던 그 꿈이 그리 사라져도 괜찮으냐고.


그럼 카게야마는 덤덤히 되묻곤 했다.


잘 지내셨어요? 저는 괜찮아요.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걸 한다면. 행복하다면. 잘 지낼 수 있을테니. 당신도 같은 처지일테니.약 냄새가 가득한 병원의 로비에 앉아있던 카게야마가 몸을 일으켰다. 그건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 카게야마는 금방이라도 죽고 싶은 이 무기력감을 벗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아직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 난 봄을 기다리고 있는걸까.


카게야마가 눈을 감았다. 이기적이야. 모두가 잃어버린 꿈을 나는 아직 바라고 있는거. 카게야마가 망가진 손을 만지작거렸다. 눈 앞이 흐려졌다. 붉게 남은 흉터자욱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도 되는걸까. 정말. 나 계속 기다리고 있어도 되는걸까. 



겨울에 집어삼켜진 봄을.




*




"토비오짱."


"......."


"잘 지내지 않았니?"


"...........그런 것 같아요."



한참의 정적 이후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 강가였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카게야마가 흐려진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은 오이카와가 천천히 카게야마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더없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도 그래."



카게야마가 조용히 오이카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아니. 나 울어도 되는걸까. 오이카와가 조용히 카게야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수 십번이고 고민하고 되내었던 그 말을 꺼냈다.



"수고했어. "



카게야마는 그 말에 끝내,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서러운 아이마냥 울었다. 오이카와도 흐려진 눈동자로 카게야마의 머리맡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괜찮아. 토비오는 잘했어. 정말. 혼자로 버거우면 같이가자. 우리.



같이. 봄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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